W&C
우리 집에서, 워치 앤 칠
나만 아는 이야기
인트로

〈나만 아는 이야기〉는 ‘워치 앤 칠’ 온라인 플랫폼을 개인의 취향대로 유영하면서 경험한 일상적인 이야기나 비평적 관점을 담지하는 텍스트를 생산하고, 온라인 플랫폼에서 공유하는 전시연계 위성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의 등장으로 영상 콘텐츠 감상방식이 급변함에 따라 예술작품이 온라인 미디어 플랫폼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감상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보다 개인적이고, 내밀한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기획되었다. ‘워치 앤 칠’과 동일하게 3개년 프로젝트로 진행될 예정이며, 방향성과 후속 전시주제의 확장 가능성을 고려하여 담론 생산을 지속하고자 한다.

〈나만 아는 이야기〉는 총 3부로 구성된다.

1부 「체험하는 미술관, 사적 공간 안으로 구겨져 들어오다」
유현주(연세대 독문과 교수)
현재 우리는 미디어 플랫폼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간편하게 영상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관람객이 더이상 콘텐츠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의 현재 위치가 콘텐츠를 감상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이 글을 통해 문화예술 콘텐츠를 온라인 미디어 플랫폼에서 감상하는 방식에 대해 비평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2부 문화계 인사들의 사실적 플랫폼 경험일기 「내밀함에 관하여」
윤향로(현대미술 작가), 조은비(독립 큐레이터), 이기리(시인)
코로나 시대의 집은 거주뿐 아니라 사무, 육아, 친목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공간이 되었다. 「내밀함에 관하여」에서는 집을 다양한 층위가 중첩된 공간으로 사용하는 동시대 문화계 인사들이 ‘워치 앤 칠’ 플랫폼을 경험하고 작성한 일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이들의 일기를 소개함으로써 개인의 취향, 주변 환경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경험과 감상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3부 소설가의 단편 플랫폼 여행 에세이 「여행」
백민석(소설가)
‘워치 앤 칠’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웹페이지를 떠돈다는 점에서 여행의 경험방식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물리적인 여행이 제한된 이 시기에 소설가가 여행하듯이 온라인 플랫폼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단편 에세이를 통해 공유하여 새로운 예술작품 감상 경험을 긴 호흡으로 공유해보고자 한다.


3부

백민석(소설가)

단편집 『혀끝의 남자』 『수림』, 『버스킹!』, 장편소설 『공포의 세기』, 『교양과 광기의 일기』, 『해피 아포칼립스!』, 에세이 『리플릿』, 『아바나의 시민들』, 『헤밍웨이』를 집필했다.


방구석 미술관, 머잖아 우리가 도달할 곳

며칠 전에 라디오에서 진행자가, 옛 정취를 간직한 스페인의 도시들을 열거하면서 어서 팬데믹이 끝나 여행을 가고 싶다, 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나 그리움이 담뿍 묻어나는 목소리로 소개하는지, 주방에서 늦은 아침을 준비하다 말고 나도 몇 년째 계획만 짜고 있는 산티아고 순례를 이제라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얼핏, 진행자가 유럽 서쪽 끝에 있는 스페인을 너무 우리나라처럼 여기고 있는데, 하는 느낌을 받았다. 스페인이 우리나라 영토인 것처럼, 전주나 군산처럼 언제든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는 우리나라의 일부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스페인은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니, 평범한 여행자에게는 전주나 군산처럼 출입에 아무 제한이 없는 나라다.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내려 숙소를 잡고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일에 제약이 없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야 하지만 그 정도 불편은 즐거운 여행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저가 항공사를 이용한다면 금전적인 제약도 별것 아니게 느껴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사라고사나 코르도바를 정서적으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도시처럼 여기게 된다.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세계 곳곳을 국경을 의식하지 않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는 여행이 자유로운 세계인들의 의식에서 국경이나 비행 거리, 비용 같은 제약들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시대다. <워치 앤 칠>에 실린 차이 시리스의 〈포시즌스〉(2010)에는 태국의 치앙마이 풍경이 잠깐 나온다. 작품의 메시지와는 무관하게 내가 그 작품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 방콕만 들르지 말고 치앙마이도 갔었어야 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고 나서 줄이어 떠오른 생각들, 팬데믹만 아니면 갈 수 있을 텐데…와 백신접종 증명서류와 자가격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와 귀국해서도 다시 자가격리를 해야겠지…, 라는 한숨 섞인 생각들이 즐거운 상상을 어지럽혔다.

여행이 편해졌다고 해서 국경이나 먼 비행 거리 같은 제약들이 실제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일반적이고 평범한 상황에서 의식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팬데믹이 시작됐고, 우리가 의식 아래로 밀어두었던 온갖 제약들이 다시 삶 한가운데로 떠올랐다. 이제 태국처럼 우리 한국인에게 연휴에 잠깐 다녀오곤 하던 아시아의 나라마저, 국경을 넘을 때면 백신접종 증명서와 자가격리 절차를 거쳐야 하는 장소가 됐다.

전시회를 보러 가서 한 곳만 보고 오는 경우는 드물다. 미술 전시회는 보통 반 시간이면 볼 수 있는 규모이고, 따라서 가까운 거리에서 열리는 전시회들을 여럿 묶어서 보게 된다. 이것이 미술 관람이 영화나 공연 관람하고 다른 점이고, 이런 이유로 인사동이나 청담동 같은 소규모 화랑들이 모인 화랑가가 형성되기도 한다. 화랑가를 돌 때면 나는 종종 여행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하나의 작품, 하나의 전시회가 그 나름대로 하나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고 본다면 여행하는 기분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나가서 보통은 한 나라, 한 도시만 보고 오지 않는다.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보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보고 오게 여행 계획을 짠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곳과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경험하고 오는 것이다. 미술 전시회를 관람하는 일은, 전시장이라는 장소에 구현된 하나의 세계를, 전시회의 작가가 평생 일궈온 그만의 또 다른 세계를 접하고 느끼고 경험하는 일이다.

팬데믹은 여행처럼 전시회 관람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여행자들이 의식하지 않았던 국경 같은 제약들이 미술 전시회를 보러 나선 관람객들에게도 갑자기 나타났다. 바로 전시장의 문턱이다. 관람객은 전시장의 문턱을 넘을 때마다 한 나라의 국경을 넘을 때처럼 체크인과 체온 측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화랑이나 미술관의 문턱은 팬데믹 이전에는 내가 결코 의식하지 못했던, 있는 줄도 몰랐던 제약이다. 한 번 화랑가를 찾아 여러 전시회를 도는 관람객에게 전시장 문턱을 넘을 때마다 매번 체크인해야 한다는 제약은 사소하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일일이 화랑이나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관람하는 일은 쉽지 않다. 미술 관람이 습관이 아닌 사람에겐 일상의 지루한 흐름을 끊는 신나는 여행 같을 수 있겠지만, 나처럼 미술 관람보다 더 애정이 가는 취미가 별로 없어 전시장을 자주 찾는 사람에겐 때로는 시간에 쫓기고 다리가 아픈 일일 수 있다. 얼마 전 리움 미술관에선 오후 두 시에 입장해서 다섯 시 반에 나왔다. 전체 관람에 세 시간 반이 걸렸다. 세 시간 반을 전시장 곳곳을 오르내리다 보면 취미가 노역이나 다름없이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인사동이나 청담동 화랑가의 전시를 두루 둘러보려면, 화랑들 사이의 이동에도 적잖이 발품을 팔아야 한다.

그렇게 미술 관람은 여러 이유에서 가성비가 떨어지는 취미 활동이 된다. 시간이 있으면 체력이 없거나 체력이 있으면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나는 전시회에 가면 언젠가 쓸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작품 사진을 찍어 보관하곤 한다. 지금 열어보니 작년 10월에 정화림 작가의 폴더를 만들어놓고는 중단했다가, 올해 10월에 권기자 작가부터 다시 폴더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 년이나 미술 관람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했어도 기록으로 남길 만큼 인상적인 전시는 없었을 수도 있다. 작년 이맘때쯤 화랑에 들어갈 때마다 온도를 재고 체크인을 하는 게 귀찮아서 젠장, 쉬어볼까 하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미술관들이 늘어난 것도 관람을 그만둔 한 이유였다. 전시회에 갔다가 예약을 하고 오라는 소리에 발길을 돌린 적이 몇 번 있었다. 이번 리움 미술관은 인원 제한까지 있어 예약도 쉽지 않았다. 팬데믹 상황이 길어지면서 볼만한 기획전시들이 줄어든 것도 관람을 그만둔 한 이유고, 내가 아무래도 코로나블루에 걸린 듯이 취미생활에 흥이 떨어진 것도 한 이유였다.

팬데믹은 이처럼 여행과 전시회 관람을,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온갖 제약들로 복잡하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제약’의 의미는 “조건을 붙여 내용을 제한함. 또는 그 조건.”(표준국어대사전)이다. 제약들이 자꾸 쌓이다 보면, 그리고 예외적 상황이 2년 넘게 장시간 지속되다 보면, 어느새 본래의 “내용”마저 변하게 되는 모양이다. 신작 영화의 개봉이 온라인 개봉으로 바뀌더니 비대면 공연이 늘어나고 방구석 해외여행 프로그램이 서비스되고 있다. 미술계에서는 팬데믹 초기에 한동안 문을 닫았던 국립현대미술관의 주최로 <워치 앤 칠> 같은 “구독형 아트 스트리밍 플랫폼”(전시 설명)이 새롭게 등장하기도 했다. 온라인에 전시 플랫폼이 있다면 팬데믹 같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도 미술관은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온라인 전시인 <워치 앤 칠>을 보면, 팬데믹 기간에 겪어야 했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팬데믹은 화랑이나 미술관 같은 장소로서의 전시회가 아닌, 온라인 전시 플랫폼 같은 비장소로서의 전시회의 활용을 적극적으로 고려해보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비장소로서의 전시회라면 관람에 방구석 같은 작은 공간만 있으면 된다. 방구석이라면 시간과 인원수 같은 온갖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지만 온라인 전시가 팬데믹으로 곤란을 겪는 미술계의 임시방편이란 뜻은 아니다.

대안도 아니다. 실제로 온라인 전시는 현대미술의 흐름을 보더라도, 팬데믹 시국의 임시방편을 넘어서 현대미술이 언젠가는 가닿게 될 결과에 가깝다. 서울시립미술관의 <하루하루 탈출한다>전(2021)은 온라인 전시가 어째서, 머잖아 도달하게 될 보편적인 전시 양식의 하나가 될 것인지 의도치 않게 보여줬다. <하루하루 탈출한다>전은 전시된 작품 상당량이 비디오 작품인 까닭에, 온라인 전시가 아니고서는 모든 비디오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일이 어려운 전시다.

보통 전시회에서 비디오 작품은 칸막이 쳐진 작고 어두운 공간을 만들어놓고 크고 작은 스크린과 모니터를 통해 감상하게 되어 있다. 관람객이 앉는 자리는 대개 딱딱한 나무로 짠 직사각형의 임시벤치인데, 착석감이 나빠 오래 앉아 감상할 수가 없다. 어떤 경우엔 개방된 공간에 디스플레이를 설치하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헤드폰을 주기도 하는데 이땐 서서 보기도 한다. 비디오 작품의 상영시간엔 창작자의 상상력에 제한이 없는 것처럼 정해진 한도가 없다. 짧게는 일이십 분에서 길게는 한두 시간이 넘어가기도 한다.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에는 <하루하루 탈출한다>전에 41명의 작가가 참여해 58점의 작품을 출품했다고 나와 있다. 나는 비디오 작품이 너무 많아 예약한 시간(팬데믹으로 관람 시간에 제한이 있었다, 팬데믹은 예약제를 만들고 인원 제한을 만들고 관람 시간에까지 제약을 만들었다) 내에 다 볼 수 없으니 맛만 보자는 생각으로 작품 앞에 잠깐씩만 앉았다 일어나곤 했다.

58점 가운데 절반만 비디오 작품이었다고 해도, 그리고 상영시간을 평균 십오 분으로 잡아도, <하루하루 탈출한다>전을 다 둘러보는 데 일곱 시간 이상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보통의 관람객이라면 그만한 시간을 미술관에서 보내지 않는다. 나는 한 작품도 끝까지 다 보지 못했다. 일반 극영화라면 예고편을 보거나 연출진의 명성을 보고서 끝까지 볼 작품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비디오 작품은 예고편도 없고 작가들 이름은 낯설기만 하다. 따라서 비디오 작품 전시회에서, 관람객 대부분은 어느 작품은 맛만 보고 어느 작품은 끝까지 볼 것인지 미리 선택할 수 없다.

그런 비디오 작품들이 이제는 어느 기획전시회를 가나 주류가 되어가고 있다. 내 기억에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는, 우리나라 미술관에서 비디오 작품은 전시회에 감칠맛을 더해주는 색다른 볼거리였다. 평면 회화를 밀어내고 혼합재료 설치 작품들이 전시장의 바닥면적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랜 일은 아니다. 이제는 평면 회화가 걸려있던 벽에 모니터가 걸려있고 비디오 작품이 상영된다. <하루하루 탈출한다>전도 “대중 미디어를 기획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전시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비디오 작품 전시를 콘셉트로 잡은 전시가 아니었다. 작가들을 섭외하고 작품을 받았더니 절반이 비디오 작품이었던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출품 작품 상당수가 비디오 작품이라면 <하루하루 탈출한다>전은, 전체 상영시간을 고려해 온라인 전시, 방구석 미술관 전시와 병행됐어야 했다.

요즘 볼 수 있는 비디오 작품들은, 텔레비전이라는 영상 매체 자체를 오브제로 삼았던 초기의 비디오 작품들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워치 앤 칠>에 실린(플랫폼이므로 ‘싣다’ ‘실리다’라는 표현이 아마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작품 중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의 TV, 첼로, 비디오테이프를 위한 협주곡Concerto for TV, Cello, and Videos>(1971) 작품과 같은, 비디오의 매체적 특성을 문제시하고 오브제로 삼은 작품은 없다. (1971)에서 무어먼은 첼로 모양으로 쌓아놓은 텔레비전 수상기를 끌어안고 연주를 하듯 활로 켜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미술)로 세상의 이목을 끌던 1960~70년대에, 비디오라는 매체는 아직 예술적 탐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21세기가 된 지금, 비디오는 유튜브와 틱톡 같은 개인 제작 영상이 홍수를 이룰 만큼 대중적인 매체가 됐다. 비디오의 매체 특성을 탐구하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인류의 삶에 밀착되고 익숙해진 나머지 그럴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완타니 시리파타난눈타쿨의 〈모든 이는…〉(2017)에서 앵무새가 툭툭 내뱉는 말처럼 (카메라만 다룰 줄 안다면) “모든 이는 현대미술가”가 될 수 있다. 비디오 테크놀로지는 더는 기존 예술과 갈등 관계에 놓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비디오를 더 잘 활용할 것인가만이 문제가 된다. <워치 앤 칠>에서도 우리는 갖가지 세분된 비디오 촬영 기법을 만나게 된다. 현대미술 전시회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비디오 작품은 디스플레이를 캔버스처럼 이용한 작품들이다(이는 사진이 평면 회화를 대체할 가능성을 탐구하던 백 년 전의 미술을 떠올리게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2021>에 나온 네 작가 중 두 작가가 비디오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데, 넓은 전시공간을 활용해 대형 스크린과 모니터를 네 개, 다섯 개씩 설치한 대형 작품들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스펙터클한 규모의 예술은 인상적이게도, 비디오 미술이 평면의 세계를 떠나 입체라는 육체성까지 띠게 됐음을 보여준다.

카위타 바타나즈얀쿠르의 〈어머니와 나(진공청소기 Ⅲ)〉(2021)는 단순히 영상만을 본다면, 가상 공간 캔버스에 띄워놓은 움직이는 오일 페인팅 같은 느낌을 준다. 휴대전화에 달린 카메라나 디지털카메라에는 사진으로 오일 페인팅의 색감을 낼 수 있는 다양한 필터들이 장착되어 있다. 해상도가 높은 디스플레이는 움직이는 회화작품을 담는 미래의 보편적인 캔버스가 될 가능성이 크다. “콜라주 기법이 유화를 대신했듯이 음극관이 캔버스를 대체할 것”*이라는 백남준의 예언은 너무 느린 감은 있으나 어쨌든 실현되고 있다(예언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음극관이 먼저 엘이디 디스플레이로 대체됐다).

캠프의 〈만에서 만을 거쳐 만으로〉(2013)는 바타나즈얀쿠르의 작품과는 다른 의미에서 눈에 띈다. 여러 해 동안 바다를 떠도는 선원들이 휴대전화 같은 개인 장비로 촬영한 영상들을 편집한 작품이다. 창작자의 역할은 영상 편집 작업에 머문다. 이 작품은 영상 편집도 창작의 영역이고, 편집만으로도 작가성이 확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1900년 이후의 미술사』, 할 포스터 외, 배수희 외 옮김, 세미콜론, 2012년 개정증보판, 605쪽.

나는 지난주에 <워치 앤 칠> 플랫폼으로 방구석 여행을 다녀왔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몇몇 작품이 있지만, 출국일에 쫓겨 다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움은 어느 여행에서나 흔하다. 나는 <워치 앤 칠>을 여행자의 마음으로 둘러봤다. 여행은 여행지에 정주하지 않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여행지에 대해 책임질 필요도 없고, 그곳의 상황에 대해 근심할 이유도 없다. 여행자는 여행지에 자리를 잡고 살지 않기 때문에, 부담 없는 마음으로 그저 둘러보다 떠나면 그만이다. 나는 <워치 앤 칠> 플랫폼에 실린 작품들에 대해서도, 내가 여행지에서 하던 대로 그곳에 정주하지 않는 사람, 떠나면 곧 잊게 될 여행자로서 보고 말하고 있다.

전시회의 작품을 대하는 관람객의 태도는 여행지에 대한 여행자의 태도와 같다. 관람객도 작품의 소유자가 아니다. 작품을 구매할 수는 있지만 대개는 전시장에 잠깐 머물다 나올 뿐이다. 작품에 애정을 갖고 작가에게 존경심을 품을 수는 있지만, 전시회의 상황에 대해 관람객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어떤 관람객도 작품의 운명을 놓고 자기 소유물에 그런 것처럼 근심하지 않는다.

<워치 앤 칠> 플랫폼을 처음 열었을 때 나는 거기서 무엇을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메인 페이지의 소개 글을 읽긴 했지만 설명과 실제가 같을 리 없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여행자는 처음에는 그곳에서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른다. 가이드북이 있지만 가이드북이 제공하는 정보는 나만의 특별한 경험과 깨달음을 얻길 바라는 여행자에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시회도 마찬가지다. 그냥 작품을 쭉 훑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런 건 누구에게도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워치 앤 칠>에 실린 비디오 작품들을 순서대로 틀어볼 수는 있겠지만, 나는 <워치 앤 칠>에서 특별히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해야 할까.

전시회를 둘러보면서 자기만의 특별한 경험과 깨달음을 얻는 일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 시린 세노의 〈꽃을 따는 것〉(2021)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미군 점령기에 벌목촌에서 찍힌 오래된 흑백 사진들을 한 장씩 넘기면서 설명해주는 형식의 작품이다. 식생에 대한 설명, 벌목꾼들에 대한 설명, 지역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나가다가 문득 커다란 나무에 올라탄 남성들을 찍은 사진에서 설명을 끊고는 이런 감상을 덧붙인다. “자연을 배경으로 한 사진들은 특징이 있다. 남자들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다. 나무보다 작은 남자들이 나무를 밟고 서 있다.” 이 감상은 언뜻 〈꽃을 따는 것〉의 작품 의도와 무관한 돌발적인 발언처럼 들린다. 해설에도 작품은 “식물과 나무의 이야기”이고 옛 사진들을 통해 필리핀의 과거와 “자본주의 발달 이면의 뒤엉킨 뿌리를 사유”하는 작품이라고 나온다. 〈꽃을 따는 것〉이 속한 <워치 앤 칠>의 파트는 반려 관계에 관한 파트, <내 곁에 누군가> 파트다.

그럼에도 “자연을 배경으로 한 사진들은 특징이 있다.”라는 깨달음은 작가가 옛 벌목촌 사진들에서 과연 무엇을 꿰뚫어 봤는지, 통찰했는지를 인상적으로 들려준다. 필리핀에서 백인 남성들은 자기보다 훨씬 큰 나무를 짓밟고 서 있었던 것이다. 벌목촌 사진들에서 자본주의에 훼손되어 가는 필리핀의 자연을 읽어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작가도 처음에는 그 누구나 볼 수 있는 사실에 대해 말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옛 사진들은 인간이 식물과 나란히 선 사진, 반려 식물에 대한 사진들로도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한 장씩 그 의미를 따지다 보니, 그 모든 옛 사진들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진실이 눈에 띄었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 남성들이 자연을 지배했다는 통찰은, 벌목 회사를 세우고 식민지 경영을 하며 노예처럼 필리핀인들을 부렸던 지배자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들은 자본가, 지주, 주인, 세도가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남성들이었고, 그 같은 깨달음으로부터 우리 같은 관람객도 필리핀의 식민지 시절을 더 잘 이해할 기회를 얻는다.

내가 <워치 앤 칠>에서 원하는 것이, 시린 세노가 옛 사진에서 얻은 것 같은 나만의 깨달음, 통찰이다. 나는 <워치 앤 칠>에서 모두가 다 볼 수 있는 것만을 보고 싶지 않다. 어느 전시회엘 가든 마찬가지다. 나는 어느 전시회에 가서나 누구나 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다 오고 싶지 않다.

<워치 앤 칠>에는 음악이 인상적인 작품이 두 편 있다. 지앙 지의 〈날아, 날아〉(1997)와 구동희의 〈타가수분〉(2016)은 비디오가 시작 매체이면서 청각 매체이기도 하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다. 두 편 모두에서 영상과 음악(음향)은 서로를 반어적으로 보완해주고 있다. 〈날아, 날아〉는 날갯짓하는 손을 따라, 아마도 베이징의 서민층이 거주하는 듯한 비좁은 아파트 안을 비춰준다. 아파트 내부는 비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거실 천장과 침실에는 배관이 노출되어 있고(세입자를 더 들이기 위해 불법 개축해 공간을 나눈 아파트일 수 있다), 벽에는 곰팡이로 보이는 얼룩들이 줄지어 있고, 언젠가는 더 나은 집으로 옮겨가리라는 희망을 상징하듯 베이징 시내 지도가 걸려있다. 주방은 불결하고 출입문은 녹이 슬었고, 공용인 듯한 화장실에는 쭈그리고 앉아야 하는 화변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 암담한 가난의 공간에서 손 하나가 춤을 추듯 날아다닌다. 그리고 그 배경으로 19세기 프랑스 작곡가 마스네의 오페라 <타이스>에 나오는 <명상곡>이 흘러나온다. 우아한 손동작과 감미로운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가난의 암울함을 반어적으로, 강렬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타가수분〉도 음향효과와 음악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작품은 두 공간을 교차해서 보여주는데, 하나는 어느 부잣집의 근사한 욕실이고 하나는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파는 주점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욕실에는 틀어놓은 수돗물 소리가 요란하고, 주점에는 뽁뽁이로 불리는 에어캡을 터뜨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영화의 음향효과는 관람객이 흔히 접할 수 있는 생활 소음들이다. 〈타가수분〉은 일부러 생활 소음의 볼륨을 높여놓아, 관람객의 귀를 따갑게 해 영상보다는 음향에 더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타가수분〉에도 음악이 나온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인데, 아마도 클라이맥스인 부분(시간상으로 이쯤이면 클라이맥스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지점)에 배경으로 쓰인다. 이 경쾌한 관현악곡은 작품 후반부에 수수께끼 같은 장면들이 이어질 때 느닷없이 끼어든다. 흥미롭게도 <왕벌의 비행>은 생활 소음에 비교해 더 크지도 더 작지도 않은, 같은 레벨의 볼륨을 갖는다. 생활 소음이 배경음악과 똑같은 비중으로 쓰인다는 사실은 소음의 존재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공간이 교차하면서 음향효과 역시 교차한다. 물소리와 강냉이를 꺼내는 소리, 비누를 깨뜨리는 소리와 새우를 씻는 소리, 기름이 끓는 소리와 자쿠지에서 거품이 흘러나오는 소리 등등이 작품 내내 이어진다. 수수께끼 같은 후반부 장면들의 의미를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작품에서 공간의 교차, 음향의 교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빈부 격차가 가져온 문화적 괴리일 수도 있고,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대비일 수도 있다. 이 대비의 불분명한 의미 역시 작가의 의도인 듯하다. 이분법적 갈등에서 벗어난 대비로, 관람객이 작품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음향효과의 쓰임을 봐도 알 수 있듯 〈타가수분〉은 극영화적인 기법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연출에 활용한 작품이다. <워치 앤 칠>의 다른 작품들이 영화적인 과장을 보여주더라도 대개 회화적(오민의 〈에이 비 에이 비디오〉(2016)처럼 몇 개의 정지 화면을 이어붙인 듯한)인 구성으로 되어 있거나, 차재민의 〈안개와 연기〉(2013)처럼 다큐멘터리 같은 사실적인 촬영과 편집으로 제작된 것에 비하면, 확실한 차이를 보여준다. 때문에 〈타가수분〉은 미학적으로 비디오 작품을 미술로 볼 것인가, 단편 극영화로 볼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비디오 작품이 만약 미술이라면, 극영화와 미학적으로 구별되는 비디오 미술만의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질 수 있다. 나는 미학자가 아니므로 손쉽고 상식적인 답변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20세기 초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들이 그랬듯이, 제도의 맥락에 따라 미술관에 전시되면 미술품이고 영화관에서 상영되면 극영화라는 답변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의 맥락’은 시대가 흐르면서 너무 단순하고 편의적으로 미술을 재단하는 구분법이 된 듯하다. 나 같은 비전문가조차, 미술인가 영화인가를 구분하는 일에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들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비디오 미술이 영화 기법의 활용에 능숙해질수록, 사람들은 비디오 미술이 극영화와 같아지기를, 극영화와 같은 기술적 완성도를 보여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모순되게도, 극영화가 보여줄 수 없는 비디오 미술만의 가치와 영역은 무엇일지 묻게 될 것이다.

〈날아, 날아〉와 〈타가수분〉의 엔딩 크레딧에는 작품에 어떤 음악을 썼는지 나오지 않는다. 아니, 엔딩 크레딧 자체가 없다. <워치 앤 칠>에 실린 작품 대부분에 엔딩 크레딧이 없다(이 사실 또한 비디오 작품이 아직은 평면 회화처럼 개인의 순수한 창작물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방구석 미술 관람의 장점은 여기서도 느낄 수 있다. 나는 휴대전화의 음악 검색 프로그램을 열어 스피커에 가져다 댔고, 네이버의 인공지능이 십 초도 지나지 않아 작품에 쓰인 곡의 곡명을 알아냈다. 나는 방구석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느긋하고 게으른 태도로, 작품을 잠시 멈춰놓고 유튜브와 내가 가진 음반들로 <명상곡>과 <왕벌의 비행>을 감상했다. 방구석 미술관에선 하나의 작품을 여러 차례 끊어서 볼 수도 있고 여러 번 반복해 볼 수도 있고, 배경음악이 마음에 들면 다른 채널로 얼마든지 잠시 나갔다 들어오는 일이 가능하다.

<워치 앤 칠> 전시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미디어 환경으로 변화한 집의 다층적 연결성을 사유하”(전시 소개)려는 시도다. 언뜻, 내게 주어진 ‘여행’이라는 글의 주제와는 맞지 않아 보인다. 여행은 집을 떠나야 성립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데믹이 갑자기 모든 것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미술관이 문을 닫아도 우리는 방에서 클릭 몇 번으로 <워치 앤 칠>의 비디오 작품들을 즐길 수 있고, 나 역시 양말도 신지 않은 채 <워치 앤 칠> 플랫폼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떻게 여행이 미술 관람 행위와 공통된 함의를 가지는지, 팬데믹이 그 함의를 어떻게 더 명료하게 만들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내 글은 여행과 관람 행위의 최근 변화에 관한 이야기지만, 사실상 팬데믹에 의해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우리의 ‘집’이고 초고속 인터넷이 깔린 ‘방구석’이다. 어느새 “우리의 집은 거주의 사적 기능을 넘어 공적인 영역으로 진입했고, 팬데믹은 집의 이러한 현실을 더욱 드러나게”(전시 소개) 했다.

감염병으로부터 안전한 공간이라는 집의 가치는, 집을 더욱 사적인 공간, 격리된 공간으로 만들었다. 한편, 집 밖의 공간은 거꾸로 이런저런 제약으로 부자유와 답답함의 공간이 됐다.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단계에 따라 달라지는 이동 거리와 모임 인원의 제한, 영업시간의 단축이라는 제약을 받게 되었다. 집 밖은 언제든 감염의 위험이 있는 규제의 공간이다. 해외여행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팬데믹이 끝나도 여행의 자유를 전만큼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국경은 열려도 팬데믹으로 타격을 크게 입은 나라는 치안이 좋아질 때까지 여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집 바깥에 없는 자유를 찾아 스스로 격리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민의 〈에이 비 에이 비디오〉(2016)는 팬데믹 이전에 제작되었음에도,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재미나게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끊임없이 거실과 주방 집기들의 위치를 옮기고 쌓고 다시 배열한다. 팬데믹이 없었다면 아마도 다르게 이해되었을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내 눈에는 집안의 물건을 이리저리 마음껏 배치하면서 자유에 대한 열망을 무의미하게나마 충족시키고 있는 듯 보인다. 말하자면 팬데믹 시대의 ‘혼자 놀기’다.

위안 광밍의 〈주거〉(2014) 역시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다르게 이해되었을 작품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 이 작품은 집 안에 격리되어 머물며 시간을 보내다 실제 세계에 대한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의 몽롱세계로 보인다.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자 눈앞의 현실(거실)은 어항 속에 설치된 이미테이션의 세계, 몽롱세계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스트레스와 분노와 긴장이 차오르기 시작하고, 결국 한계에 이르러 그 몽롱세계는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설명 하나 없이 몽상적인 이미지들로만 이뤄진 〈주거〉는, 팬데믹으로 집 안에 스스로 갇힌 우리의 내면에 끓어오르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극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좁은 집안에서 마스크를 벗고 가족들과 접촉하는 자유를 만끽한다. 집 밖에서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그래서 여행의 막바지에 공개된 차지량의 〈뉴 홈〉(2012)과 씨씨 우의 〈유만혼의 미완된 귀환〉(2019)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뉴 홈〉의 등장인물들은 자기 소유의 집이 없는 사람들이다. 월세나 전세를 사는 이들은 밤마다 취미생활을 위한 동호회 모임처럼 모여 비어있는 집들을 탐험한다. 아직 입주가 이뤄지지 않은 빈집(이들이 세를 들어 사는 집보다 크고 안락한)의 문을 열고 들어가 각자 방을 나눠 갖고, 언젠가 자신들 소유의 집이 생기면 할 법한 집안 꾸미기 놀이를 한다. 각자 삶을 이야기하고 각자 꿈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당장 생활할 집은 있지만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희미한 불안을 안고 사는 이들이고, 오늘 밤 점거한 집 같은 번듯한 집을 영원히 살 수 없으리란 절망의 흐릿한 냄새를 맡고 있는 이들이다. 〈유만혼의 미완된 귀환〉의 주인공은 오래전에 실종된 소년이다. 그는 작품 속에서 “부모와 형제”가 기다리고 있는 집의 바깥을 십수 년째 떠돌고 있다. 집 밖에 있는 그에게 집 바깥은 현실로, 집 안은 장난감 동물들과 함께 놀 수 있는 아련한 꿈속 같은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는 아직도 현실에서 꿈으로 귀환하지 못했다. 〈뉴 홈〉과 〈유만혼의 미완된 귀환〉은 집 없는 이들에게 집이란 무엇일지를 묻는 작품이다. 집이 안전하고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팬데믹 시대의 분석은 집이 없는 이들에겐 무의미하다.

<워치 앤 칠> 플랫폼 같은 방구석 미술관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지금은 뛰어넘을 수 없을 듯이 느껴지는 여러 한계는, 촬영과 디스플레이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점차 극복되리라는 예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비디오 미술에 관한 일반의 인식도 어떻게든 바뀔 것이다. 우리는 머잖아 집에서도 큰 디스플레이로 빌 비올라의 스펙터클한 비디오 작품을 감상하게 될 것이고, 조지 시걸의 등신대 조각들을 가상현실을 통해 집안으로 불러들일 것이고, 고해상도 모니터가 잭슨 폴록의 어지러운 물감 뿌린 자국과 색채의 미세한 변화까지 잡아내 집 거실을 명화의 방구석 미술관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차재민의 〈엘리의 눈〉(2020)에는 ‘엘리’라는 이름의 인공지능 아바타가 등장해 살아있는 사람들을 상담한다. 이 아바타는 내담자의 신체 반응을 살펴 심리분석에 이용할 만큼 복잡한 사유가 가능한 존재다. 우리는 미술품의 제작, 재현, 전시에 도움이 될 테크놀로지가 얼마나 어디까지 발전하게 될지 예단할 수 없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텔레비전의 등장이 영화관을 사라지게 하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은 살냄새와 숨소리와 살갗의 감촉이라는 아날로그 감수성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여전히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진짜 미술관에 모여 함께 발품을 팔고 북적거리며 작품을 감상하길 바랄 것이라고?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세상은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날로그 감수성이 가리키는 방향성은 지금에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다. 아날로그 감수성의 방향 역시 세상이 변화함에 따라 함께 수정을 거듭하게 될 것이다. <워치 앤 칠> 플랫폼이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그저 방구석에서 접속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아날로그적이었다’며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펜데믹이 우리 인류에게 보여준 것은 세상이 어떻게 나아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사실의 명백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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